지난 3일 4.29 관악을 재보궐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정의당 이동영 예비후보가 ‘제1야당교체’란 슬로건을 내걸었다. 정확하게는 “무능하고 무기력한 제1야당을 교체하고 국민에 편에 설 제대로 된 대안야당으로 정권교체를 실현해야 한다”라는 주장이다.
이동영 예비후보는 기자회견문에서 “진보재편과 제1야당교체를 위해 노동당과 국민모임, 노동정치세력에 4.29보궐선거 공동대응을 제안”하며, “야권의 심장부이자 진보정치 1번지인 관악에서 벌어지는 이번 선거는 국민의 편에 서는 정치, 제대로 된 야당을 바라는 정치세력들의 단결된 힘으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진보재편’과 ‘제1야당교체’가 한 사람의 입에서 발화되는 시대다.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이래 별도의 영역으로 존재했던 ‘제1야당’의 공간과 ‘진보정당’의 공간이 포개지고 있다. 물론 민주노동당 역시 ‘제1야당교체’, 정확히는 수권가능한 양당의 한축이 되는 것을 꿈꿨을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제1야당 지지자들이 ‘비판적 지지’를 요구하며 진보정당 운동을 억누르는 상황에서 진보정당의 역할과 정체성은 제1야당과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주력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들이 이상적으로 보았던 정치지형도 역시 진보정당이 양당제의 한축이 되는 것보다는 독일식 정당명부제와 같은 제도개혁이 뒷받침하는 다당제로의 이행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진보정당 운동의 당사자들이 그러한 구별을 허물고 있다. 심지어는 현재 진보정당 중 세력이 가장 약소한 원외정당인 노동당의 당직선거에서도 ‘진보재편’과 ‘제1야당교체’라는 구호가 함께 등장했다. 지난 1월 30일 노동당 당직선거에서 새로이 당대표로 선출된 나경채 대표는 선거기간 동안 "한국 정치의 변화를 위해 우선 노동당과 전체 진보진영이 제1야당을 교체하겠다는 목표를 공유해야 한다"라며 "이 목표에 접근하기 위해 우리가 처한 조건을 스스로 변화시켜야 하고 그래서 진보정치의 결집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기껏해야 지지율이 1~2% 정도일 의석 하나 없는 군소정당의 당직 선거에 나온 포부로는 믿기 힘든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새정치민주연합의 대항마가 되려는 국민모임에 전격 합류한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의 발언 역시 이들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정동영 전 장관의 1월 19일자 발언을 보면 “국민신당 모임의 목표는 진보정당들 가운데 또 다른 하나의 진보정당을 만드는 것이나, 또는 기존에 있는 진보정당들을 통합해내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라며 “지금 있는 제1야당이 야당 구실을 못한다고 보고 야당을 교체해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를 담아내는 데 있다. 그러니까 대화로 큰 도로를 내는 것”이라고 한다.
어찌된 일일까. 한국 사회의 진보정당 운동이 이제 안정적으로 제3세력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촉나라가 위나라를 치듯 본격적으로 ‘북벌’의 길에 나선 것일까. 제1야당에서 대선후보로까지 출마했던 정동영 전 장관은 위나라에서 귀순한 후 북벌의 선봉장이 된 강유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일까. 이는 우리가 아는 한국 사회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진보정당 운동의 그간 몇 년은 굳이 삼국지에 비유한다면 촉나라가 사분오열되어 난립하는 것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이런 일이 일어난 까닭이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의 사정과 여러 진보정당들의 사정이 미묘하게 결합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먼저 새정치민주연합의 사정을 보자. 새정치민주연합은 지난 2년간 박근혜 정부의 실정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에게 수권정당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평가를 들어왔다.
특히 새정치민주연합은 계파다툼으로 유명했는데, 그것은 흔히 ‘친노’ 대 ‘비노’의 싸움으로 요약되곤 했다. 여기서 ‘친노’는 ‘강경파’의 위치를 점유했고 ‘비노’가 ‘온건파’의 위치를 잡았다. 문제는 이 ‘강경’과 ‘온건’의 내용에서 발생했다. 흔히 ‘친노’그룹 내지 그 동조자들이 보여주는 ‘강경’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서민들이 우려하는 사회경제적 문제와는 관련이 멀었다. 그들이 말하는 ‘강경’은 대체로 대통령을 거세게 비판하는 방향이었고, 지난 대선을 국정원에 의해 저질러진 부정선거라 개탄하거나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귀태’라고 비난하는 식이었다. 최근까지도 새로이 당권을 쥔 문재인 대표나 이해찬 의원 등의 발언을 통해 소위 ‘친노’라 불리는 이들의 ‘강경’ 기조의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온건파를 자처한 비노들의 경우 중도파를 잡아야 한다는 명목으로 현재 새누리당의 정책과 새정치민주연합의 정책 중간 지점의 타협지점을 명시한 경우가 많았다. 한때 제3정치세력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안철수 의원 역시 특히 새정치민주연합에 합류한 이후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 체제에서 이와 비슷한 모습을 보인 바 있다. 한국 사회의 제1야당은 이명박 정부 이래로 무상급식과 보편적 복지를 말하는 등 정책적으로 좌클릭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는 그들의 자유주의 정책 노선과는 상충되는 것이었고 그 결과 확실한 정체성을 세우지 못한 채 지지율이 떨어질 때마다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오락가락이야말로 유권자들이 그들을 신뢰하지 못하는 원인이었건만, 그때마다 강경파는 온건파를, 온건파는 강경파를 비난하기에 바빴다.
생각이 있는 이들이라면 정통성과 명분론의 문제에서는 소수 강경파의 목소리만을 대변하지 않으면서, 사회경제적인 정책노선에서는 지금의 새정치민주연합보다 진보적인 제1야당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할 만했다. 진보적인 지식인 사회 일각에서는 “이럴 때 진보정당이라도 단합해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2000년대 초반 민주노동당과 같은 정당만 있었어도 지금의 새정치민주연합의 지지율을 금세 흡수했을 것이다”라는 푸념이 나왔을 정도였다. 국민모임이란 정치조직은 바로 이러한 현실인식 때문에 출발한 것이라 하겠는데, 그들로서는 새정치민주연합 내 친노세력의 전횡으로 인해 되도록 많은 이탈자가 나오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정동영 전 장관은 현 시점에서는 그들의 바람을 따른 유일한 중량감 있는 이탈자이다.
즉 ‘진보재편’과 ‘제1야당교체’가 함께 운위되는 상황은 진보정당 운동의 강력함 때문이 아니라 제1야당의 무력함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 눈을 돌려 진보정당 운동의 영역을 바라본다면 이들 역시 무력의 골짜기를 헤매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다. 진보정당 운동의 영역엔 통합진보당이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되기 전까지 통합진보당,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이 공존했다. 이중 녹색당은 2000년대 초반의 민주노동당과 사회당을 뿌리로 삼는 기존 진보정당 운동과 다른 맥락에서 발생했으며, 현재로서도 진보재편의 움직임에 합류하지 않을 것임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기존 진보정당 운동의 흐름을 계승하는 정당으로는 해산된 통합진보당 외에 정의당과 노동당이 남는다. 정의당은 통합진보당 당권파를 제외한 참여계, 인천연합 등 일부 자주파, 일부 진보신당 출신들이 모여 있는 당이며, 노동당은 통합진보당에 합류하지 않았던 진보신당 세력에 사회당이 통합되어 구성된 세력이다.
그런데 정의당과 노동당의 경우 당대당 통합만으로는 시너지가 크게 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당시 민주노총 등 노동계의 배타적 지지 방침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정의당이나 노동당이나 회복하고 싶은 것은 그 노동계와의 연대라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정의당과 노동당의 당대당 통합만으로는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진보정당 운동에 대한 불신과 회의가 깊어진 노동계를 설득하기가 다소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한편으로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노동계가 힘든 투쟁에서 고립되어 가면서 노동계 일각에서도 진보정당과의 연계를 복원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생겨났다.
노동정치연대를 필두로 한 노동계 일각에서 국민모임과 접촉하며 국민모임, 노동정치연대, 정의당, 그리고 노동당을 포괄하는 정치세력을 추구하게 된 데엔 이러한 양측의 이해관계가 녹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양측의 이해관계를 요약하는 슬로건이 바로 ‘제1야당교체’와 ‘진보재편’이며, 예전에는 상관이 없어 보였던 두 구호가 함께 나오는 상황도 바로 이러한 맥락 위에서 이해할 수 있다. 노동당에서도, 정의당에서도, 노동정치연대와 국민모임과 정동영 측에서도 같은 말이 나오게 된 까닭이 이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만큼 새로이 큰 세력을 만들어 새정치민주연합과 제1야당의 자리를 놓고 자웅을 겨루게 될 것인가? 그렇게 보기에는 어려운 지점이 많다.
첫째는 객관적인 정당의 규모의 문제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제아무리 지리멸렬하더라도 130석의 의석을 가진 정당인 반면, ‘제1야당교체’를 내세우는 저 연맹에서 의석을 가진 것은 정의당의 5석 밖에 없다. 왕년의 대권후보였던 정동영이 합류했다지만 새정치민주연합 내부에서 ‘정동영계’는 소멸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지지율의 측면에서도 잠깐 국민모임의 지지율이 새정치민주연합을 앞서는 것으로 나오긴 했지만 최근 박근혜 정부의 지지율 붕괴로 새정치민주연합의 지지율이 반등하면서 경쟁력이 희석되었다.
둘째는 국민모임 등이 ‘제1야당교체’를 내걸지라도 선거에서는 야권연대를 전적으로 부정하기 힘들다는 데에 있다. 정의당 역시 현역 의원들의 경우 다음 총선에서 새정치민주연합과 야권연대를 하지 않으면 재선이 어렵다고 판단할 것이다. 이미 진보정당 운동의 응집력이 약해지는 상황에서 국민모임과 정동영까지 합류하는 신당이 생긴다면 통일된 전술에 의해 움직이기 보다 동상이몽에 빠질 공산이 크다.
셋째론 기존 진보정당(정의당 및 노동당)과 국민모임의 조직방식이 삐걱거릴 가능성이다. 정의당과 노동당이야 양측 다 진성당원을 표방하므로 통합이나 이후 당운영을 논의하기가 쉽다. 하지만 국민모임의 경우 새정치민주연합과의 경쟁을 원한다면 진성당원제와 다른 형태의 조직을 원할 가능성도 크다. 과거 열린우리당은 거대규모 정당에서 기간당원제를 실험한 적이 있으나 시너지 효과가 나기는커녕 삐걱거리기만 했다. 특히 일반시민이 당원이 되는 것에 큰 두려움을 느끼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대중성을 추구하는 국민모임과 진성당원제를 포기하기 힘든 정의당 및 노동당이 당운영방식을 놓고 대립할 경우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기 힘들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모임이든 진보정당이든 탄탄한 지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국민모임의 지반은 전무하다 봐야 할 것이고, 진보정당은 지반이 있기는 하되 약해지고 붕괴하는 과정에서 국민모임 측의 대중성에 혹하는 상황으로 보인다.
이는 제1야당과 진보정당 운동의 동반쇠락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상황이다. 제1야당은 그간 ‘보스정치’와 ‘지역주의 정치’의 타파를 떠들어 왔지만 이후 온 것은 ‘참여정치’와 ‘이념 및 정책 경쟁의 정치’가 아닌 ‘팬덤정치’와 ‘바람의 정치’였다. 지구당을 폐지하는 등 당의 기능을 약화시킨 정치개혁안들은 정당의 지반을 약화시키기만 했다. 진보정당은 비록 지구당 폐지에 반대했지만, 이후 민주노총 등 노조가 고립되는 상황에서 진보정당 운동의 지반이 약화되는 상황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결국 국민모임, 노동정치연대, 정의당과 노동당을 엮는 책략은 일견 장쾌해 보이지만 현재 야권 정치의 파행의 원인을 정면으로 직시하지 않고 요행수로 돌파하려는 무리수로 여겨진다. 이러한 무리수가 얼마나 성사되기 어려운지는 새정치민주연합에 합류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상당한 국민적 지지를 얻고 있었던 안철수 의원의 행보가 증명한다. 정의당은 당시에도 안철수 의원에게 일말의 기대를 걸었으나 결과적으로는 허송세월한 셈이 되었다.
물론 그럼에도 ‘진보재편’이나 ‘제1야당교체’를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겠다. 다만 현재의 위기는 그러한 재편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위기는 결코 떨쳐지지 않을 것이란 전망만큼은 공유될 필요가 있다.